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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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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 13:2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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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심리
Ⅰ
"그러나 사람이 혼자 있을 때,
너무나 어둡고 고요한 밤이 다가와서 남은 세월을 가감(加減)하는 생각이라든가
얼마나 시계(時計)바늘이 돌아갔는가 하는 것을
무자비하게 증명하는 일련(一連)의 불쾌한 사실들이라든가,
내가 사랑하며, 원하며, 소유하며, 그리워하며, 노력하는 모든 것들을
마침내 삼켜버릴 저 어두운 검은 바람벽이 천천히 그리고 쉬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때
모든 인생의 지혜 같은 것은 모두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어버리고
불안이 잠못 이루어 하는 사람 위에 마치 무거운 질식할 듯한 덮개처럼
덮어버리는 것이다."
[넋과 죽음](Seele und Tod)이라는 논문에서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카알.구스타브.융(C.G. Jung)이 한 말이다.
이 글이 발표될 무렵, 융은 아직 만 49세였다.
그 뒤에 융은 37년을 더 살아 죽기 전까지 글을 쓰다가 86세의 고령으로 이승을 하직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현세나 인생이나 미래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누구나 그것은 좋지 않은 것, 불합리한 것, 노이로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노령에 가까와 온 사람이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남모르게 불안이나 공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뼈저린 일종의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머리를 써서 "누구나 다 죽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해도
이런 생활의 지혜가 그 노인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노인의 심리를 말하라 한다.
그러나 노인이 되어보지 않고 어떻게 노인의 심리를 말할 수 있으랴.
노인의 심리는 노인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른다.
눈이 안보여 돋보기를 쓰기 시작하며
젊은이들이 이제는 자기를 귀찮은 존재로 보기 시작하는 듯한 눈치를 채며
남모르게 서글퍼지는 연령에서 노인을 말하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솔직하게 노인의 심리를 말해 줄 것인가.
"아침 저녁 적당한 운동을 하고,
나의 기분은 아직 20대의 청년과 같다"고 하는 70세 노인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저 49세의 융이 묘사했듯이 잠 안오는 밤에
죽음의 불안에 허덕이고 있지 않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노인은 자기가 노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을 것이며,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마음을 속이고 있는지 모른다. "노인이란 이런 것이다"
노인의 심리란 이렇고 저렇고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린이란 이런 것이고 청년이란 이런 것이고 중년은 이렇고
노인은 이렇다는 공식적인 견해는 사실 그럴싸한 객관성을 제시하지만
그런 견해가 모든 노인의 심리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잘 해야 통계적인 노인심리의 평균치인데
이것을 너무 절대적인 사실처럼 믿으면
이런 설명이 하나의 관을 이루고 관이 하나의 주의를 낳고
주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강요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을 만들어진 청년 중년 노인의 틀 속에 두드려 맞추려는
제도(制度)를 주장하기에 이르면
인간의 개성의 자유로운 성장이 침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청년이거나 노인임에 그치는 존재(存在)가 아니고
개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인을 말할 때 노인에게도 개성(個性)이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우리가 말하는 노인의 심리는 노인들의 심리의 다양성 가운데
어느 한 보편적인 측면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노인에 투사 하는 우리 자신의 심리
혹은 노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 즉 노인관인 것이다.
Ⅱ
가끔 나는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서양의 노인이 얼마나 고독에 몸부림치고 있느냐
거기 비해서 한국의 노인들은 얼마나 행복하냐고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이 있다.
이들의 결론은 대개 그러니까 노인들은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하고
노인의 권위가 존중 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귀착한다.
이들은 대개 노인들이 개를 데리고 공원 벤취에 홀로 쓸쓸히 앉아 있는 것을
보거나 양로원의 비참한 광경을 예로 들거나
때로는 노인이 서양에 많다는 사실을 든다.
아마 어떤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 전차간에 서 있어도
새파란 젊은 여자들이 자리를 비켜줄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서양 노인의 어느 한 측면만을 보고 느낀 결과이고
노인을 우대하는 전통적인 동양 사람의 사고방식에서
내리는 일방적인 평가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동양문화의 노인관에 따라 생기는
주관적이고 어떻게 보면 감성적인 평가이고 결코 사실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지내는 서양의 여러 노인들을 알고 있다.
나는 공원의 벤취에서 혼자 개를 데리고 졸고 있는 노인이
향수에 젖은 한국의 여행객이 느끼듯 그렇게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외로운 것은 여행객의 마음이며
이 순간 그는 자기의 부모를 생각하며 고향에 홀로 떨어져 있는 부모에의 그리움,
부모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거기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 벤취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 왜냐하면 그것은 건강에 좋기 때문에 - 강아지의 재롱이나 모이를 주워 먹는
백조의 긴 화사한 목을 눈여겨보거나
오늘은 무슨 좋은 음식을 어느 레스토랑에서 가서 먹을까 생각하고
이번 주말에는 조카인 제니가 손자를 데리고 찾아 오겠지 생각하다가
깜빡 졸았을지도 모른다.
그 노인은 부족 할 것이 없는 연금을 받고 불편하지 않는 집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 그다지 불행하단 말인가.
나는 서양거리의 전차 안에서 젊은 부인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내어 주거나
어쩌다 바닥에 떨어진 핸드백을 주워 주거나 코트를 입는 것을 거들어 주는
백발의 노인을 흔히 보았다.
남존여비 장유유서의 전통에 젖은 동양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적 가치관과 꼭같은 서양근대의 평등사상에서 우러나온
지극히 자연스러운 서양인의 습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녀린 여성'에 대한 남성으로서의 보호 의식을 거의 의무처럼 여기는
하나의 기사도 정신을 그 백발의 노인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 보호받는 여성이 그로 인해서 결코 교만해져서 노인을 깔보고
학대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스위스의 한 연구소에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연구소 계단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랑곳 없이 노인을 스쳐지나
빠른 걸음으로 앞서 오고 있었다.
나는 달려내려가 노인을 부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나의 선의가 오히려 역겨운 듯이 저리 가라고 손을 젓고
끝내 혼자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서양에 갓 들어온 당시의 나는 무척 무안했으나
유럽생활을 오래 하면서 나는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우리의 예절이 반드시 보편 타당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근대사회의 서양의 노인들은 그들이 어릴 때 교육을 받은대로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한다는 투철한 자주성을 노인이라는 연령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그렇게 키웠듯이
그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자주성(自主性)을 자신에게 적용하며
결코 자녀양육의 대가로 자식들에게 효도와 무조건의 순종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죽을때까지 책을 쓰며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또 화필을 놓지 않는 개성있는 노인들이 건재함으로써
유럽 문명은 그 많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들의 문화를 견실하게 지탱해 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인의 창조적인 역할이 반드시 서양에서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능한 것이며 동서를 막론한 과제라고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Ⅲ
"생을 두려워하는 청년은 노년에 가서 죽음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던 융의 경험담이다.
노년은 청년 없이 존재하지 않고 청년은 소년이나 소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은 어떻게 늙느냐 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노인을 이와 같은 성장의 과정을 빼놓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인공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진실로 살 줄 아는 사람은 진실로 죽을 줄도 아는 사람이다.
청년기의 정신적인 문제가 인생에 뛰어 들어 살고자 하지 않는데 있다면
노년기의 정신적인 문제는 죽음을 외면하려는 데 있다.
누구에게나 개성이 있고 인생의 여러 시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양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가지 움직일 수 없는 노년의 보편적인 특징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모든 면에서 신체적으로도 쇠약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기력은 약해지며 기억력도 많이 감퇴되고 정력도 쇠약해지며
그의 피부는 이미 팽팽하지 않고 주름이 생기며 시력이나 청력도 감퇴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별 도리가 없다.
얼마 전 60세의 생일을 맞았던 나의 스승인
융학파의 심리학자 폰. 푸란트 여사가 편지 끝에
"이제는 나도 늙어서 모든 일을 가능한 한 천천히 하는 버릇을 익혀야겠다"고
적어 보낸 일이 생각난다.
자기의 신체적인 한계와 인생의 자연적인 과정에서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를 알고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동시에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의 삶을 살며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며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
이것은 아직 그렇게 죽음이 가까이 있지 않다고 착각하는
청장년의 이상적인 희망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나는 80세를 넘은 어느 노인이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고민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의 생활은 건강을 돌보는 프로그램으로 거의 차 있었다.
'기억력을 좋게 하는 약'을 쓰는가 하면 '적당한 운동'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그리고 '성관계의 조절'등 그밖에도 많은 자질구레한 일과표에 의하여
진행되던 것이다.
그의 생에 대한 애착, 신체적 생명에의 헌신적인 귀의(歸依),
그것은 거의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밖의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죽음'이란 말은 하나의 금기 - 아예 입밖에 내어서는 안되는 단어였다.
인생을 정리하고 죽음에 대비한다는 생각이
그의 의식에서 얼마나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의 마음은 죽음을 의식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것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피하고 있을 따름이다.
죽음을 앞에 둔 강열한 생에의 집착은 거의 본능적인 충동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에의 인상을 무자비하게 깨트리는 것은 치료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인은 어찌하여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결코 노년에 생긴 반응이 아니라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인생에 대한 태도의 정점이라고 볼 때
젊어서부터 삶에 대한 태도를 고쳐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나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다'라고 융은 말한다.
인생의 정점에의 상승과 죽음에의 하락, 그것은 생의 자연적인 곡선이다.
이 자연의 생활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다.
사회적인 성공과 번영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하강을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하강이 결코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실이며 내면생활에의 심화. 내실임을 깨닫지 못한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이런 사람들은 세속에 집착하게 된다.
세속이란 사회적 지위 명성등을 존중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자기가 늙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70세의 할머니가 분을 바르고 진한 루우즈를 칠하고 빨간 무늬의 와이셔츠를
걸친 같은 또래의 할아버지와 소년소녀같이 "하니, 하니"하면서 행동을 하는
경우를 미국의 거리에서는 가끔 보지만 이것은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항상 젊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나라일수록
노인들은 어딘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드러낸다.
이것이 지나치면 동양에서는 '늙은이의 주책' 이라고 한다.
노인의 완고성, 욕심, 잔소리, 간섭, 노파심, 편견, 권위의식-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런 부정적인 특징은 뇌(腦)의 기능이 전 같지
않은 데도 그 까닭이 있지만 죽음을 외면하려는 세속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노인은 자기중심적인 어린애와 같아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노하고 노여워하게 된다.
아들을 독차지하고 젊은 며느리를 질투하며 미워하는 시어머니의 태도도
이와 같은 과거에의 집착,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무한한 공포감에서 오는
집착이라 볼 수 있다.
앞을 바라보고자 하는 용기가 없는 노인은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저승의 사자가 그의 생명을 취하고자 왔을 때
그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어느새 세월의 시간에 실려 온 자기를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노인의 어린이에의 퇴행이 극도에 도달하면
그것의 거의 병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
오줌, 똥을 아무데나 싸고 도덕심, 수치감이 없어져서
되는 대로 행동하는 가 하면 남을 의심하는 정도가 지나쳐 망상이 되는 등
흔히 '노망'이라 불리는 상태가 되는데
이것은 노인성 정신병이라는 병이어서 정신과 전문의에 의하여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병은 예방(豫防)하는 것이 더 좋겠는데
신체적인 건강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무척 긴요하다.
마음의 건강이란 다름 아닌 청장년시대의 생활 속에서 소홀히 하였던 것,
잊어버린 자기의 여러 분신을 되찾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년이란 정리하고 보충하는 시간이다.
'죽음이란 생의 완성이다' 하거니와 잊어버렸던 나 자신을 찾아
그것을 키우는 것이며 그것이 무엇인가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마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오히려 오래 살고,
삶에 매달리고 죽지 않고자 하는 사람은
오히려 노년에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의학의 창을 통해서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Ⅳ
밖에 보이는 효과, 밖으로 향한 관심, 작업의 신속(迅速)성, 적극성, 합리성,
조직성 - 이와 같은 젊은이에 어울리는 특징을 능력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노인의 존재는 쉽게 소외되게 마련이다.
범 세계적으로 청년의 역할이 비대(肥大)해지는 경향이지만
한국사회도 어지간히 청년 중심 경향이 제도화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의 창의성이 그만큼 증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청소년만 있고 건강한 노인이 없는 사회는 팔다리만 있고
머리는 없는 기형과 같다.
그 사회는 철학이 없이 행동만 하는 사회가 되기 쉽다.
소아 - 청소년 - 중장년 - 노년이 각각 특징을 갖춘 하나의 생의
여러 매듭이라면, 이 특징을 모두 골고루 살릴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기에 앞서 말한 노인의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건전한 측면이 요청되고
또한 이것이 키워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인의 고집과 완고함이 지혜로운 철학과 인생에 대한 의연한 자세로,
노인의 잔소리와 간섭이 조용한 설득으로,
그의 소심한 노파심과 유약(柔弱)한 체념이 인자(仁慈)한 사랑과 달관(達觀)의
경지(境地)로 바뀌어야 하는 것인데
한국사회에도 이러한 노인들이 많이 건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노인은 하나의 거목과 같다.
아이들이 그 그늘에서 쉬고 뛰어 놀 수 있는 울창한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인생의 여러 시기가 연륜을 읽는다.
노인의 마음속에는 어린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는 이 모든 시간의 총화(總和)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의 여러 단계는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 가능성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에서 이미 죽음을, 시작에서 끝을,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미래의 청년, 미래의 노년에의 완결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융은 어린이 원형, 영원한 젊음의 원형,
그리고 '늙은 현자의 원형'( Archetype of old wise man )을 말하고 있다.
'늙은 현자'는 우리들의 꿈이나 신화에 나오는 백발의 도인과 같은 요소이다.
스스로 늙은 현자라고 착각(錯覺)하는 노인이나, 젊은이들이
늙은 현자라고 잘못 보는 노인은 이 세상에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현자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다만 노력할 것이다.
우매(愚昧)와 아집(我執)과 탐욕(貪慾)을 벗고 지혜를 기르며
고독과 죽음을 용기있게 받아들여 영원(永遠)을 향하여 눈을 뜨며
편견(偏見)과 독선의 일방성을 지양하고 양극(兩極)을 하나의 마음으로
화합하고자 힘쓸 뿐이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오직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창조에의 길은 개인마다 다르므로
하나의 형식이나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각자가 자기자신과 더불어 자기의 갈 길을 모색할 따름이며
또한 사회는 노인의 그러한 노력(努力)을 최소한 막거나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처럼 노인의 형안(炯眼)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때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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